1980년대 강남 논밭에 대학병원 들어선 사연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㉚ 강남 병원시대의 개막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금의 강남 지역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특별시는 1970년 전후로 농촌 지역이었던, 한강 남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65년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에 이어 1969년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개통됐지만 이때만 해도 한강 다리들은 각각 공장지역인 영등포와 지방을 잇기 위한 수단으로 보였다. 지금의 ‘강남 시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시 영등포 동쪽을 영동지역이라 했고, 논과 밭이 대부분이었다. 1973년에 도봉구과 관악구, 1975년에 강남구, 그리고 1977년에 강서구가 분리돼 독립 구가 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부를 영어로 ‘Ministry’로 명명했는데, 경제기획원은 ‘EPB(Economical Planning Board)’라고 했다. 1962년 EPB 주도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했는데, 제4차 5개년계획에서는 ‘경제개발’을 ‘경제사회발전’으로 바꿨다. 정부는 보건복지에 무게추를 뒀으며 한국경제원(KDI) 산하에도 보건부서를 뒀다. 1977년에 국민소득 1000달러를 목표로 삼았고 1월에 의료보호, 7월에 당연적용 의료보험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이 무렵, 대학병원이 ‘영동’과 영등포에 들어선 것은 우리나라 의료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이다.

그것은 1975년 8월 연세대 김효규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과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의 격의 없는 티 타임에서 비롯됐다. 남 장관이 독일 파송 간호사의 귀국 시 취업 문제를 걱정하자 김 원장이 “재정 지원이 가능하다면 병원을 세워 파독 간호사들이 취업토록 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함으로써 시작한 것.

☞관련기사: ‘서울대병원 건립을 세브란스가 도와준 사연’ (https://kormedi.com/1325904/)

경제기획원은 이런 의견을 독일정부에 알렸다. 독일 정부는 타당성 조사단을 파견했다. 조사단은 병원 병상점유율이 50% 미만이고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 미만인 당시 우리나라의 보건의료 형편을 두루 살펴보면서 의료서비스 현황을 조목조목 파악했다. 이들은 병원 필요성에 대해서도 물었는데, 현장에 있던 필자는 “1977년에 당연 적용 의료보험이 시작될 예정이고, 정부 목표인 소득 1000달러, 100억 달러 수출이 달성될 것이 예상되므로 의료수요가 중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일정부에서 병원 1개를 건립하는데 재정차관 지원을 하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을 터이므로 우리 정부 제안에 긍정적이었다. 의료원장은 필자에게 병원 건립 제안서를 작성하라고 시켰다. 강남지역에 500병상 규모의 병원을 건립하고 뇌, 심장, 어린이 센터를 염두에 두도록 했다. 경제기획원은 독일정부 재정차관으로 병원을 건립하도록 독일재건은행(KFW)과 협의했고, 국회 경제과학심의위원회와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보건사회부에서 제동을 건 것. 이 프로젝트는 사립대학교에서 독일 재정차관으로 제안한 것이므로 문교부(현 교육부) 소관이었다. 그러나 병원을 건립하려면 보건사회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므로, 이를 감안하여 보건사회부와도 접촉하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의료원장은 “문교부 소관인데, 굳이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가 참조하도록 할 필요성이 있느냐”고 외면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된 것.

어느 날 김효규 의료원장이 공군본부 의무기획담당관으로 근무하는 필자에게 직접 전화를 하였다. 차를 보낼 터이니 급히 학교에 오라고 해서 점심시간에 의료원장을 만났다. 보건사회부 의정국장이 의료원장에게 전화해 신현확 보사부 장관이 반대하고 있다고 귀띔했다는 것.

나중에 알아보니 장경식 의정국장이 장관에게 결재를 받으려 하자 무슨 서류인지를 물었다.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서명한 제안서라며 요약해 설명하자 장관은 버럭 화를 내면서 서류를 집어던졌다. 사립대학교에서 어떻게 정부 재정차관을 받으며, 무의지역이 허다하고 산업병원이 부족한 현실인데, 왜 서울에 병원을 건립하려 하느냐고 강력하게 반대 목소리를 냈다는 것.

연세대가 600만 달러 독일정부 재정차관을 받으며 병원을 짓는 프로젝트에 대해서 자신에게 제대로 보고도 안 된 상태에서 서명한 것에 대해 불쾌하고 화가 난 듯했다. 정부 재정차관이므로 목적이 같으면 연세대가 아닌 다른 기관에 줘도 관계없으므로, 연세대에 준다는 보장이 없다고 한마디 했다.

필자는 대방동의 공군본부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버스를 타고 광화문 앞 정부종합청사에 있는 보건사회부에 갔다. 전공의(조교)일 때 보건사회부/WHO 종합보건개발사업에 상대역으로 일하면서 보건사회부 의정국 직원들과 가깝게 지낸 바 있었다. 강원식 과장은 필자가 묻기도 전에 장관이 버럭 화를 낸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면서 “정부가 병원 건립에 긍정적일 터이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일러줬다. 장관이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한 최재유 박사(연세대 의대 1929년 졸업)와는 가까운 관계임을 알려주었다. 부지런히 학교로 가서 의료원장에게 설명해 드렸다.

김효규 의료원장은 최재유 동문을 모시고 신현확 장관과 면담했다. 신 장관은 강남에 건립하려는 병원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고, 경기도 3개 군(성남, 광주, 용인)에 50병상 농촌병원을, 인천 남쪽 공장지역에는 100병상의 산업병원을 건립하도록 제시하고 김 원장이 동의하자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이른 바 영동프로젝트(The YongDong Health Service Project March 15, 1977)가 출범한 것이다. 김효규 의료원장이 총괄하면서 필자를 기획관리 실무책임자로 임명했다. 1976년 9월 허허벌판에 논밭이 다였던 도곡동에 대지 7213평을 매입했다. 1977년 봄 군 복무를 마치고 전임강사로 복직했고, 영동프로젝트를 계속 담당했다.

1977년 3월 독일에서 영동프로젝트 재정차관평가단이 방문했다. 영동프로젝트 계획서를 상세하게 검토하면서 병원의 내부 시설과 장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병원경영에 관하여서도 자료를 요청하기에 매우 바빴다. 다행히도 1974년 불광동 가족계획연구원에 컴퓨터 터미널이 설치되었기에 군 업무를 마치고 퇴근해 대형컴퓨터 사용법을 터득한 경험이 있어서 평가단이 병원 건립평가를 위해 요청하는 자료를 컴퓨터로 처리해서 이튿날 전달하곤 하였더니 놀라는 분위기였다.

1978년 계획이 확정돼 도곡동에 영동세브란스(현 강남세브란스) 건설의 첫삽이 꽂혔고 1983년 4월 개원했다. 독일 재정차관 병원건립을 이야기한지 7년 반이 걸렸다. 1981년 용인과 광주 농촌분원과 주안 산업병원의 대지를 매입하여 이듬 해에 착공했다. 성남에는 이미 병원 건립을 신청하여 승인을 하였기에 광주와 용인에 농촌병원을 건립했다.

1982년에 양재모 교수가 연세대 의무부총장 겸 연세의료원장에 취임하였다. 새 병원에서 근무할 교수직과 행정직이 젊은 층 중심일 것이 예상되므로 젊은 층인 김영명(1960년 졸업, 이비인후과)을 원장으로 임명했으며, 병원은 매끔하게 잘 운영됐다. 인천산업병원은 공군 의무감 출신으로 전역 후 1974년부터 예방의학 교수로 근무하고 있던 문영한(산업보건, 1952년 졸업) 교수를, 광주분원은 이명진(1964년 졸업, 외과), 용인분원은 심호식(1968년 졸업, 외과) 원장이 임명됐다.

연세의료원이 독일 재정차관병원 프로젝트를 진행함을 목격한 고려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려대가 독일 재정차관 계획서 사본을 달라고 하기에 건네주었다. 당시 사회적 영향력이 대단한 장덕진 고려대학교 법학과 출신 동문을 중심으로 국무회의에서 독일 재정차관 승인을 받아 구로병원과 안산병원을 건립했다.

고려대 구로병원은 1983년 가을에 개원하였다. 구로구는 1980년에 생겼는데, 당시 수출산업공단이 구로구에 조성되었기에 활발하게 운영됐다.

1980년대 강남 논밭에 대학병원 들어선 사연
개원당시 강남세브란스(당시 영동세브란스) 전경 [사진=강남세브란스 홈페이지]
정부가 적극적으로 강남을 개발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성장 발달하는 모습이 느껴졌으며, 1980년대 강남구에 세브란스병원이 우뚝 서서 운영되었기에 흐뭇했다. 의무직을 비롯한 젊은 교직원들이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이 느껴졌다.

서울시는 매봉터널을 건립하려고 터널건립평가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에 영동세브란스는 병원 출입 도로가 문제됐다. 병원에서 도로의 중요성을 설명하였는데, 구급차와 승용차가 자유롭게 출입해야 하고, 의료기자재를 공급하는 트럭이 기자재를 내려놓으려면 출입구와 다른 차량들이 다닐 수 있는 도로 폭이 되어야 할 것 등을 알려 주었더니, 관련 위원회에서 수용하였다. 매봉터널 건립과 영동세브란스병원의 도로와 관련한 난제가 풀렸다.

‘범 강남권 병원 시대’로 눈을 넓히면 영동세브란스병원 개원에 앞서 1980년 강남성모병원(현 서울성모병원)이 지하 2층, 지상 10층, 520상 규모로 서초구 반포동에서 개원했다. 당시 주위는 그야말로 야산과 허허벌판이었다. 명동에 있던 성모병원이 이 병원과 1986년 지하2층, 지상 13층, 625병상 규모로 개원한 여의도성모병원으로 나눠졌고 명동 성모병원은 가톨릭회관으로 바뀌었다. 한동안 강남성모병원과 성모병원으로 불리다 각각 서울성모병원과 여의도성모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9년에는 송파구 풍납동에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이 개원했다. 설립자인 고 정주영 회장이 병원을 기업 홍보수단으로 삼지 말고 오로지 복지에만 전념하라는원칙을 세워 병원 이름에 ‘현대’도, 정 회장의 아호인 ‘아산’도 쓸 수 없어 당시 서울 끝자락에 있으면서도 ‘서울중앙병원’이란 이름이 붙었다. 사람들은 한동안 ‘현대중앙병원,’ ‘서울현대병원’ 등으로 불렀다. 병원은 개원 초기에 풍납동에서 해마다 일어나는 수해로 1층과 지하층이 물바다가 되기도 했지만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세계적 병원으로 성장했다.

강남구에서는 1994년 일원동에서 삼성서울병원이 개원했다. 당시 대학병원은 1000병상 규모였다. 그런데 삼성서울병원을 건립하면서 1200병상으로 하겠다고 하자, 서울중앙병원은 기존 병원에 한 동을 추가로 건립하여 동관, 서관으로 2000병상 규모로 증축 운영하게 됐다. 삼성서울병원은 친절한 의료문화와 새 영안실 문화 등을 의료계에 몰고 왔다.

88올림픽 때 영동세브란스병원은 의료서비스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필자는 86아시아경기대회와 88올림픽 의무지원시스템 개발 연구프로젝트 책임자였기에 선수촌병원 관리운영을 비롯하여 영동세브란스병원과 긴밀하게 응급의료시스템을 챙겼다.

 

    유승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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